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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사상자 유가족연대  안타까운 그들 - Casualty List


ㆍ작성일

2003년 6월 4일 수요일

ㆍ군별

육군

ㆍ계급

일병

ㆍ소속부대

육군 제23사단 58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

ㆍ사고일자

2002.07.03

ㆍ사고유형

사망

ㆍ심의결과

사상

ㆍ조회: 9518       
박성식

● 출신학교 : 대구 계명대 휴학
● 군수사 결과 :
● 유가족 의견 : . 이름: 오마이에서
2002/7/19(금)
조회: 47

국방부, "구타 고참 쏜 뒤 자살"'사인 해명' 미흡 논란 계속될듯  
[현지취재] 유족들, "국방부 발표 못믿겠다"며 계속 농성중

황방열/공희정 기자 hby@ohmynews.com  

이유야 어쨌건 다 키운 자식이 군에 가서 싸늘한 시신이 돼 돌아온다면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이 지난번 서해교전과 같은 전쟁상황에서 전사를 하건, 아니면 설사 본인 과실로 목숨을 잃건 슬프고 안타까운 건 매 한가지일 것이다.

구타, 총기사고, 훈련사고 등 군내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달초 동해의 한 전방사단 해안초소에서 경계근무를 나갔던 두 병사가 모두 총기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한 두 병사 가운데 한 병사의 유족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보름이 다 되도록 아들의 장례도 미룬 채 군 병원 영안실에서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유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군 당국의 해명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이 병사의 한 유족으로부터 사망사건의 의혹 등에 대해 제보를 받고 16일 본사 기자를 현지로 파견, 진상취재에 나섰다. 군 당국은 이번 두 병사의 사망사건과 관련, 이례적으로 18일 오전 서울 국방부에서 정식 브리핑을 통해 수사결과를 공개하는 한편 당일 해당 부대에서는 유족들에게 이를 설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오마이뉴스>는 현지에서 유족과 군부대 관계자 등의 증언, 설명을 토대로 관련기사를 싣는다.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를 시작으로 두 젊은 병사의 '죽음의 비밀'이 속시원히 밝혀져 유족들의 가족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군 당국에 대해서는 이번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과 함께 차후로 이같은 사건이 거듭되지 않도록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편집자 주>


▲ 강릉 국군병원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성식 일병의 부모와 가족들. 앞줄에 앉은 두 사람이 박 일병의 부모.  
ⓒ 황방열
<제2신:18일 오후 3시>

국방부,"구타 고참 쏜 뒤 자살"
'사인 해명' 미흡 논란 계속 될듯

지난 7월 3일 강릉 사천 해수욕장 근처 해안초소에서 발생한 군 총기사망사건과 관련, 일부 유가족들이 은폐 의혹을 제기하는 등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18일 오전 10시 국방부 기자실에서 긴급히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등 해명에 나섰다.

이날 중간 수사결과를 브리핑을 한 충용부대 정훈공보참모 하두철 대령은 "초소 밖에는 혈흔이 없고, 경계근무 규정에 의하면 경계투입 후에는 초소 출입문을 안쪽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초소 내에서 발생된 총기사고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 국방부가 18일 발표한 '인터넷 민원 의문제기 사항 답변서'  

ⓒ 국방부
그는 이어 "최 상병의 총기는 총기 거치대에 놓여 있고, 박 일병의 총기는 최 상병의 사체 위에 놓여 있었으며, 발견된 7발의 탄피 감식 결과 전량이 박 일병의 총기에서 발사되었음이 확인됐다"면서 "박 일병의 뇌수 일부와 혈액이 최 상병의 사체 위에 흘러있어 최 상병, 박 일병 순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하 대령은 이어 "사고 전날인 7월 2일 최 상병이 박 일병을 폭행한 바 있고 7월 3일 증가초소 투입 시 최 상병이 취침중인 박 일병을 선택하여 동행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증가초소에 투입된 후 최 상병이 박 일병에게 시비를 걸어 다툼이 있었고, 박 일병이 이에 반발하여 소총에 결합된 빈 탄창을 제거한 후 휴대하고 있던 탄창 1개(15발)를 소총에 삽탄·장전하고, 최 상병을 위협할 목적으로 실탄 4발을 공포사격 한 뒤 최 상병에게 2발을 발사, 최 상병이 사망하자 본인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총구를 자신의 턱에 대고 머리를 약간 젖힌 상태에서 1발을 발사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총격이 있었을 당시 인근에 있는 군부대에서는 아무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점, 박 일병이 빈 탄창을 제거하고 실탄을 장전해 총격을 가하려고 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최 상병이 무방비로 당했는지 등 여러 부분에서 해명이 부족해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군 당국은 오늘(18일) 오전 10시 국방부 기자실에서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와 동시에 국군강릉병원에 있는 박 일병의 유가족들에게도 수사결과를 알려주려 했으나 유족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유족들은 "수사기록 열람과 사건당시 상황을 재현해보자는 요구를 무시한 채 군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라며 "이 발표를 끝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서 발표하겠다는 것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군의 수사결과 발표내용을 접한 뒤 "전체적인 내용 모두를 납득할 수 없다"며 농성을 계속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박 일병의 외삼촌 김호선 씨는 "우선 오늘 발표가 원래부터 계획된 것이었는지 의문"이라며 "발표내용을 볼 때 언론이 취재에 나서고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수사결과 발표를 급조한 게 아닌지 의심이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특히 '(최 상병이)설마 박 일병이 총을 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저항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최소한 몸싸움 이상의 행동들이 있다가 실탄이 든 탄창을 끼웠는데 설마 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전혀 납득이 안 된다"며 "또 초소 안과 밖에서 발견된 탄알들에 대한 부분, 인근 초소에서 총성을 듣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고 지적했다.

유족들은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진정을 낼 계획이다.

국방부는 이날 총기사망 사고 중간수사결과 발표와는 별도로 인터넷에 제기되고 있는 의문사항을 12가지 문답형식으로 답변서를 준비했다.

"종교가 없었다면 아마 참지 못했을 것"  
- <인터뷰> 최모 상병 고모 최혜선 씨  

두 병사의 '의문의 죽음'은 아직 그 구체적인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두 병사 가운데 박 모 일병의 유족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는 반면 또다른 희생자인 최 모 상병의 유족은 사고 발생 3일 뒤인 지난 6일 곧바로 장례를 치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최 상병측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현지에서 부대 관계자들을 통해 최 상병 유족측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군부대측이 '사생활 보호'를 내세우며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아 접촉이 안되다가 18일 국방부를 통해 연락처를 확보, 최 상병의 고모 최혜선 씨와 전화통화에 성공했다.

최 씨는 "종교가 없었다면 아마 (이번 사건을) 참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히고는 박 일병의 유족들에 대해 심한 불만을 나타냈다.

다음은 최 상병의 고모 최선혜 씨와의 통화내용 요약.

-박 일병 가족에 대해 울분을 표할 법도 한데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다.
"종교가 없었다면 못 참았을 것이다. 할머니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다. 죽은 아이까지 가족 모두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 춘천 국군병원에서도 천주교 장례식을 치렀다.

만약 우리 아이만 죽고 저 쪽 자식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난리 친다고 해서 우리 아이가 살아온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저 쪽 자식도, 우리 자식도 다 죽었다.

올케(최 상병 어머니)가 장례 치를 때 '박 일병 용서하고 가라'고 했다. 저 쪽은 자식이 또 있지만 우리 오빠는 달랑 아들 하나 뿐이었다."

-부검과 화장 등을 빠르게 처리한 이유가 있나.
"오빠(최 상병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사고가 난 초소 현장 검증을 하고 군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해도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지 않느냐. 누구 탓할 생각도 없었다.죽은 아이의 유골은 현재 군 영안 보관소에 있다."

-박 일병 쪽에서 인터넷 등에 올린 글을 봤나.
"우리는 당한 쪽이다. 저쪽 쳐다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기절했다 깨나기를 반복하는 부모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박 일병 가족들의 글을 보면 심정이 어떻겠나. 아이를 영창대기자라고, 상습적인 구타꾼이라고 했는데 인권모독이다.

그렇게 키우지도 않았고 그런 아이도 아니다. 그렇게 문제가 있었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처리됐겠는가. 도대체 저쪽이 뭘 원하고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수사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에게 수사 결과가 전달되면 우리 나름의 법적 대응을 할 생각이다. 요즘 군대가 함부로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가.
"복장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다는 것 아닌가. 우리도 박 일병이 총 쏘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뭐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계획적인 것이었기에 일방적으로 당한 게 아닌가 싶다."
/ 강릉=황방열 기자    

다음은 국방부가 18일 발표한 브리핑 내용(별첨 상자기사)과 '인터넷 민원 의문제기 사항 답변서' 전문.

인터넷 민원 의문제기 사항 답변서

1. 군 수사당국 발표에 두 병사가 사고 전 격투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람의 옷차림이 단정하였고 초소 내부도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는 주장.
"방탄모피 계급장 부착띠가 이탈되어 있고 턱끈이 풀려 있었으며 2명 모두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있고 박 일병 우측 손에 일부 찰과상 및 타박상의 흔적이 있다."

2. 빈 탄창 제거, 실탄장전 등 행동 시 최 상병 무방비상태였던 점. 박 일병 손이 총기 방아쇠가 아닌 총열덮개를 잡고 있는지 의문.
"설마 박 일병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저항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 발사 즉시 총기가 미끄러 떨어지면서 손가락이 방아쇠울을 이탈, 총열 덮개로 이동된 것으로 추정."

3. 뇌수와 탄두의 흔적이 박 일병 뒤쪽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박 일병 우측에 있고 머리가 앞으로 숙여진 자세가 자살로 보기 어렵다는 의문.
"턱밑으로 들어가 이마부분으로 관통하여 뇌수와 탄두의 흔적이 뒤쪽으로 나올 수 없음. 초소가 좁고 등 쪽에 벽이 있어 머리가 앞으로 숙여짐. 외부 침입 흔적 없음."

4. 초소 안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면 왜 초소 내부 벽에 피 자국이 없는지 의문.
"초소 안 우측 의자 위 및 출입문 좌측 벽과 의자 위에 많은 양의 혈액이 비산(사방으로 날아 흩어짐) 되어 있으며 천장부분에 박 일병의 뇌수가 붙어 있었음."

5. 최초 총성 3발이었다. 현장검증 후 7발이 발사되었다는 의문. 탄피 4개와 실탄 1발을 지뢰탐지기로 찾았다고 하는데 탄피가 모래 속에 박힐 수 있는지. 찾아낸 실탄 1발과 탄피 4발의 위치 및 거리를 정확히 답변 못한 이유.
"민간인이 3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하여 일단 3발이 발사된 것으로 최초 추정, 현장 검증 시 5발이 부족하여 익일 주변을 지뢰탐지기로 수색, 실탄 1발, 탄피 4발 발견. 감정결과, 총 7발이 일병 박 일병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확인. 탄피의 비산거리는 통상 3~8미터."

6. 박 일병 사망에 몇 발이 사용되었는지 모른다는 의문.
"일단 외상을 통해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부검을 통해 사입구와 사출구, 두개골 파손정도를 보아야 자세하게 알 수 있음. 하지만 유가족 측에서 부검을 거부해 현재 미확인."

7. 군에서 보도자료 배포전, 유가족 도착 시까지 현장 보전했다고 했는데 사건 개요가 한국일보에 먼저 보도된 이유.
"초병이 119에 신고하여 경포소방서 구조대원 2명과 사천파출소 경찰관 4명이 현장에 도착 확인. 취재원에게 사실을 확인 부대로 요청."

8. 최 상병이 타인의 총기를 휴대한 의문.
"K-201유탄발사기가 무겁고 실탄박스까지 휴대하는 것이 불편했던 것으로 보임."

9. 최 상병의 사체가 좁은 초소 안에 맞추어 놓은 듯이 누워있는 의문.
"유가족이 오기 전까지 현장을 그대로 보존"

10. 사체가 1시간 30분이 지나서 발견된 의문.
"경계근무 규정에 따라 초소 출입문을 안쪽에서 시건. 후번 근무자 2명이 13:05분 경 발견."

11. 최 상병이 피해자라면 유족이 박 일병의 유족에게 울분을 표하지 않고 현장검증 후 부검과 화장을 황급히 한 의문.
"최 상병 유족은 박 일병 유족들이 '사죄를 하거나 조문을 해야하지 않느냐'며 분개, 유족간의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춘천병원과 강릉 병원으로 격리, 장례 준비."

12. 문제 사병인 최 상병에게 실탄을 주고 경계근무를 서도록 한 점에 대해 군에서는 관리감독 태만으로 책임을 져야.
"폭행내용이 경미하여 '불기소처분' 종결한 사건. 11소초에서 9초소로 옮겨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토록 조치."


국방부 브리핑 자료 (24사단 일병/상병 총기사망사고)  

사망자: 제23사단 58연대 1대대 1중대 9초소(9-13)
1) (M60부사수) 일병 박**(20)
2) (k201유탄수) 상병 최**(20)

■ 사고 개요

1)2) 사망자는 연대장의 지시로 짙은 해무로 인한 경계근무강화를 위해 02. 7. 3. 11:00-13:00까지 소속대 9-13초소에서 경계근무 중, 동일 11:40경 동초소 안에서 원인불상 1)사망자 두부 관통총상, 2)사망자 좌측 흉부 관통총상으로 사망해 있는 것을, 동일 13:05경 근무교대를 위해 사고초소에 투입되던 후번 근무자 상병 김태우 외 1명이 발견하여 현장부근에서 작업 중이던 민간인 핸드폰을 이용, 소초에 상황보고 하였고, 14:10경 사단/군단 헌병대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 현장 상황 파악 후 현장보존하고 있다가 유가족 현장 도착 시 상황설명 및 현장 검증 실시.

■ 조치경과

7. 3 13:05경 최초발견
22:00 유가족에게 사고현장 설명 후 사체 영안실 안치
(박 일병: 국군 강릉병원/ 최 상병: 국군 춘천병원)
7. 4 14:00경 유가족 1차 사고설명회(국군강릉병원 영안실)
14:30경 미 회수 했던 5발(실탄 1/ 탄피 4) 회수
7. 5 15:00경 유가족 사체확인(영안실)
7. 7 10:00경 유가족 2차 사고설명회(강릉병원 소회의실)
15:00경 유가족에 의한 수사기록 및 수양록 열람
7. 9 14:00경 국방과학연구소/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합동 사고현장 감식
7. 12 22:00경 유가족 요구사항(7개항)을 사단 법무 참모에게 제시
7. 13 14:30경 유가족 요구에 대한 답변 제시, 유가족 수용거부로 결렬(소회의실)
18:30경 부친이 사체 부패여부 확인요청으로 사체 확인 조치(영안실)
7. 15 17:00경 원주병원장, 병리과장 입회 하에 유가족 사체 재확인

■ 수사경과

● 정밀 현장 검증
- 1차 : 02. 7.3(수) 14:00-15:30 군단헌병대장 주관
- 2차 : 02. 7.4(목) 14:00-16:00
- 3차 : 02. 7.10(수) 15:00-16:00 국과수/국과소 합동감식

● 최** 상병 사체 부검
- 일시/장소 : 02. 7.4(목) 14:00-15:00/국군춘천병원
- 주관 :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부검팀

● 총기감식
- 주관 : 국방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과
- 일시 : 02. 7.4(목) ~ 현재까지 진행 중

● 관계자 심문 및 진술 확보
- 일시/장소 : 02. 7.4(목)~7.6(토) /해당초소
- 대상 : 소초 간부 및 병사 전원

■ 수사 중간 결과

- 초소 밖에는 혈흔이 없고, 경계근무 규정에 의하면 경계투입 후에는 초소 출입문을 안쪽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초소 내에서 발생된 총기 사고로 잠정 결론.
- 최 상병의 총기는 총기 거치대에 놓여 있고, 박 일병의 총기는 최 상병의 사체 위에 놓여 있으며 발견된 7발의 탄피 감식 결과, 전량이 박 일병의 총기에서 발사되었음을 확인.
- 박 일병의 뇌수일부와 혈액이 최 상병의 사체 위에 흘러있어 최 상병, 박 일병 순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 최 상병의 사체 부검 결과
1차 총상은 우측 겨드랑이에 들어가 좌측 앞가슴 상단부를 수평관통.
2차 총창은 좌측 옆구리로 들어가 척추뼈를 충격 후 복구에 맹관.
- 박 일병의 총창은 턱밑으로 들어가 이마를 수직 관통하였으며 뇌수의 일부가 천장에서 발견.
- 사고 전날인 7.2(화) 최 상병이 박 일병을 폭행한 바 있고 7.3(수) 증가초소 투입 시 최 상병이 취침중인 박 일병을 선택하여 동행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증가조소에 투입된 후 최 상병이 박 일병에게 시비를 걸어 다툼이 있었고, 박 일병이 이에 반발하여 소총에 결합된 빈 탄창을 제가 후 휴대하고 있던 탄창 1개(15발)를 소총에 삽탄·장전하고, 최 상병을 위협할 목적으로 실탄 4발을 공포 사격한 뒤 최 상병에게 2발을 발사, 최 상병이 사망하자 본인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총구를 자신의 턱에 대고 머리를 약간 젖힌 상태에서 1발을 발사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

■ 후속조치

- 사인규명을 위한 부검 및 총기, 탄피, 피복, 혈흔 감정결과에 따라 사건 종합
- 일병 박**의 사체처리/관계자 처리
/ 정리=공희정 기자  

<제1신:17일 오후 8시>

해안초소 병사 2명 '의문의 총기사망'
'사인 규명' 등 놓고 유족-軍 대립

지난 3일 오전 11시 40분경(추정)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천해수욕장 근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철벽부대 소속 최아무개(21) 상병과 박성식(21) 일병이 총기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를 당한 두 명의 병사 가운데 최아무개 상병의 경우 유족들의 동의하에 6일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나머지 한 병사인 박 일병의 유족들은 장례를 미룬 채 군부대측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유족들은 군부대측이 아들의 사망사건에 대해 성실한 조사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이를 은폐·조작하려 하고 있다며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국군 강릉병원에서 14일째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군부대측은 사건 현장에서 최 상병의 소총은 전방 경계창 거치대에 그대로 있는 반면 박 일병의 소총은 땅에 떨어져 있고, 박 일병의 총이 총격에 사용된 점 등으로 미뤄 하급자인 박 일병이 선임자인 최 상병을 쏘아 숨지게 한 뒤 자살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중이다.

군 당국은 특히 이번 사건이 가혹행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18일 오전 10시 국방부 기자실에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당일 강릉 국군병원에 있는 박 일병의 유가족들에게도 이를 설명할 계획이다.

사고가 발생하자 군 당국은 사고 발생 당일(3일) 저녁 10시경 유가족 입회하에 현장검증을 실시했으며, 이튿날 현장검증 과정을 촬영한 테이프를 유가족 모두 앞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 국군강릉병원이 발급한 고 박성식 일병의 사망진단(시체검안)서.  


그러나 이후 군 당국이 유족측을 대한 태도와 군 당국이 밝힌 조사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적지 않다. 특히 박 일병 유족들은 구타사건에 연루됐던 최 상병에게 실탄을 소지한 채 후배병사와 함께 경계근무를 내보낸 점은 군 당국이 지휘책임을 져야할 대목이라고 주장했다. 박 일병의 유족들은 군 당국이 이 사건을 은폐, 축소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농성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의혹제기와 논쟁점 거론에 앞서 이 사건에 대한 독자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고현장 상황과 비디오 테이프를 본 유가족들의 증언, 군 당국의 조사내용, <오마이뉴스> 기자의 현장취재를 토대로 사고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지난 3일 오전 철벽부대는 바다안개 증가로 인해 해안 경계근무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해안경계병인 최 상병과 박 일병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의 해안초소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이 초소(23시단 1대대 9-13초소)는 평소에는 근무자가 없지만 안개가 자욱할 경우나 특이사항 발생시 병력이 투입되는 '증가초소'였다.

당일 두 병사는 빈 탄창 1개를 총에 꽂은 채 15발의 탄알이 든 탄창 2개를 양쪽 가슴에 한 개씩 달고 나갔다. 이 탄창 2개는 소대장 도장이 찍힌 종이로 봉인돼 있었다. 초소에 들어간 이들은 11시 13분에 상황보고를 했다.

인근 사천해수욕장에 있던 주민들에 따르면, 이날 11시 40분경 두 발의 총성이 울렸고 조금 뒤 다시 한 발의 총성이 또 났다고 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인근초소를 비롯한 군부대에서는 이 총성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초소간 거리는 500∼600m라는 것이 군의 설명이다 (그러나 <오마이뉴스>기자가 사고가 난 해안을 둘러본 결과 사고가 난 초소와 옆 초소와의 거리는 불과 100여m 정도였으며 이 초소들을 관할하는 소초와의 거리는 300m 정도였다).

두 병사가 사망해 있음을 첫 발견한 사람은 이들의 다음 근무자들이었다. 낮 1시 15분경 교대차 초소에 도착한 이들은 최 상병과 박 일병이 사망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근처에 있던 민간인의 핸드폰을 이용해 부대와 소방서에 신고했다. 당시 초소 내부의 통신시설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방서에서는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렸으며 근처에 있던 부대원들이 곧바로 현장에 나타났다. 이어 오후 1시 20분경 소방서 요원이 달려왔고 이어 경찰과 상급 부대요원들이 도착했다.

오후 3시 40분경 대구에 있는 박 일병 가족에게 연락이 닿았고, 박 일병의 가족은 저녁 10시경 군 관계자들과 함께 사고가 난 초소에서 현장검증을 시작했다. 군 당국은 현장검증을 비디오 캠코더로 촬영했으며,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사고 당시 상황 그대로 보존했다고 밝혔다.

http://www.ohmynews.com/down/images/1/hjyu99_75918_1[3].jpg
▲ 두 병사가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해안초소  

ⓒ 황방열

초소는 해안경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가로 약 2m, 세로 1.5m, 높이 2m 정도였으며, 해안가 쪽으로 경계창이 나 있고 그 반대편(소나무 숲 쪽)에 출입구가 있다. 초소는 땅을 파고 들어앉아 있고, 출입구 양 옆에는 벽쪽으로 의자 2개가 있었다. 박 일병은 키 175cm에 몸무게 78kg 정도이며, 최 상병도 비슷한 체격이었다고 한다.

박 일병은 쪼그려 앉은 자세였으며 의자모서리에 기대 있던 머리는 출입구쪽(소나무 숲)을 향해 있었다. 오른손은 최 상병의 배 위에 올려져 있는 총열 덮개 위에 올려져 있다(현장을 본 유가족과 현재까지는 사건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외부인인 소방관의 증언이 어긋나는 부분. 유족측은 박 일병의 총이 최 상병 몸 중앙에 최 상병 누워있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고 밝혔으나 소방관들은 총구가 박 일병 쪽을 향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고 밝힘). 최 상병의 배 위에 있는 총은 박 일병의 것으로 개머리판이 최 상병의 다리 쪽을 향해 있었으며 조준간은 '단발'로 고정돼 있었다.

최 상병의 총은 해안 경계창에 거치돼 있었다. 최 상병은 머리가 문 쪽으로 향해 누워 있었으며, 두 사람의 머리는 근접해 있었다. 박 일병은 턱밑에서 쏜 총을 맞은 것으로 보였으며 최 상병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맞은 총탄이 왼쪽 가슴을 관통해 왼 팔목까지 부상을 입었다. 최 상병은 또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쪽에서 쏜 총알이 등 하단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박 일병의 왼쪽 볼이 부어 있었고, 오른 손 가운데에 찰과상이 있었다. 유족들은 초소안에서 박 일병이 구타와 기합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사람은 상의가 하의에 정확히 들어가 있었고 발목의 고무 링도 그대로여서 종합적으로, 복장이 단정한 상태였다. 탄띠와 조끼도 가지런하게 착용하고 있었다.

박 일병의 머리 위쪽에서 조금 비스듬한(?) 위치의 천장에 뇌수와 총탄 자국이 나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초소의 안쪽 벽은 깨끗한 상태였으며, 바닥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군은 이날 현장검증에서 박 일병이 들고 나왔던 빈 탄창은 초소 밖 4∼5m 지점의 모래밭에 떨어져 있었으며, 15발들이 탄창 1개는 탄알이 그대로 들어있는 채로 박 일병의 가슴에 달려 있었다고 밝혔다. 남은 탄창 한 개는 최 상병 몸에 놓여 있던 총에 꽂혀 있는 것으로 그 안에는 예광탄 1발과 실탄 4발 등 5발이 있었고, 초소 안에서 탄피 3개와 실탄 2발이 발견됐다. 15발이 들어 있던 탄창이었으나 발견된 것은 10발 뿐이었다. 5발을 찾지 못한 것이다.

최 상병은 15발들이 탄창 2개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빈 탄창 1개는 최 상병이 들고 온 총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현장검증에 나온 군단 관계자는 "사건현장을 봤을 때 최 상병은 자신이 총을 쏴서 죽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며, 박 일병은 수사경험으로 봤을 때 자살의 가장 근원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결국 박 일병이 최 상병을 죽인 뒤 자살했다는 취지의 분석으로 보인다.


▲ 군 당국이 빼앗아간 현장검증 비디오테이프를 되돌려 달라고 하자 이를 막는 군부대 관계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유족들.  

ⓒ 박현식

다음날인 4일 오후 가족들 앞에서 현장검증 테이프가 상영됐으며 이 자리에서 군 당국은 전날 발견하지 못했던 5발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뢰탐지기를 이용해 초소 밖 모래 속에 박혀 있는 탄피 4개와 실탄 1발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군 당국은 이때 "국방수사과학연구소의 검사 결과 박 일병의 총에서 총 7발이 발사된 것으로 나왔다"며 "당일 파도가 심해 7발의 총성이 다 안 들렸던 것 같다"고 밝혔다.

비디오 테이프 녹화 내용과 군 당국의 수사내용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 유가족은 군 당국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테이프가 들어 있는 캠코더를 통째로 빼앗았다. 이어 사건 기록 일체를 보여줄 것을 요구해 다음날(5일) 오전 11시에 기록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유가족은 이런 상황에서 4일밤 박 일병의 시신 부검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러나 5일 새벽 사단헌병대 소속 군인 4명이 들어와 유가족이 방심한 틈을 타 테이프가 들어 있는 캠코더를 빼앗아갔으며 이에 항의해 뛰쳐나간 유가족과 박 일병의 친구 등 10여명을 20여 명의 군병력이 막아섰다.

이어 5일 낮, 국군강릉병원은 박 일병의 사망원인에 대해 '자살로 추정되는 외인사(外因死)'라고 밝힌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또 다른 사망자인 최 상병은 4일 새벽 춘천국군병원으로 옮겨져, 5일에 부검을 했으며 6일 화장을 했다. 그의 유골은 현재 1군지원사령부 영안 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이같은 상황을 통해 볼 때 두 병사의 사망과 관련, 군 당국의 조사결과는 몇 가지 의문점을 안고 있다. 유족들 역시 이와 유사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 주민들이 들은 총성은 3발인데 수거된 탄피는 왜 7개인가. 현장검증 때 조준간은 한 번에 2∼3발이 나가는 '점사'가 아니라 '단발'이었고 실탄이 7발이 발사됐다면 총성은 7번 울려야 했다.

2. 발사된 총알이 3발이든 7발이든, 군부대측의 주장대로 인근 초소와의 거리가 600m 정도였다면 인근 초소에서는 왜 이 총성을 듣지 못했을까.

3. 박 일병이 최 상병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하였다고 가정하자. 비좁은 초소 안에서 박 일병이 빈 탄창을 초소 밖으로 내던지고 실탄이 든 탄창을 끼우고, 노리쇠로 장전하는 동안 최 상병은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박 일병이 초소 밖에서 최 상병을 쐈을까. 근처 바닷가에 작업을 하고 있던 주민들은 초소 밖으로 사람이 나오거나, 외부에서 누가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말이 맞다면 총격은 분명 초소 내부에서 일어났다.

4. 탄피 4개와 실탄 1발은 어떻게 초소 밖으로 나간 것일까. 또 사용되지 않은 실탄 3발(초소 안에 2발, 초소 밖에 1발)은 어떻게 총에서 이탈된 것인가. 10발 중 3발이나 장전이 안되고 밖으로 떨어진 것인가.

5. 박 일병이 최 상병을 쏜 뒤 자살했다면 왜 박 일병의 오른 손이 최 상병 배 위에 있는 총의 방아쇠가 아니라 총열 덮개를 잡고 있었을까. 총구는 사람 쪽을 향해 있었다.

6. 초소 안에서 7발의 탄알이 발사됐다면 초소의 벽에도 많은 핏자국이 있어야 할텐데 왜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을까.



ⓒ 황방열
이런 의문점과 함께 유가족은 사고 이후 군 당국의 대응이 무성의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박 일병의 외삼촌 김호선씨는 "현장검증 테이프를 유족에게 주기로 해 받았는데 새벽에 병력을 동원해 빼앗아 가버렸다"고 밝히고는 "수사기록도 보여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기껏 수양록과 생활지도 기록부, 현장사진 몇 장만을 내밀었을 뿐, 정작 중요한 근무명령서와 부대일지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의문나는 점에 대해서는 부대측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면서 이 사건을 자살로만 몰고 가면서 오로지 부검동의서만 받아서 빨리 일을 끝내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찌 의혹을 가지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유가족들은 박 일병의 직속상관들이 빈소에 조문을 오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불만과 함께 의혹을 제기했다. 김호선씨는 "대대장은 영안실에 왔던 것 같은데 조문을 하지는 않고 상황체크만 하고 갔다"며 "그 밖에 소대장, 중대장, 연대장 등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현재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면담 △대대장의 사건 브리핑 △인근 초소에서 총성이 들리는지 여부 확인을 위해 공포탄 실험 △내무반 동료들 면담 및 유가족측의 진술서 작성 협조 등을 요구하면서 영안실에서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 일병과 함께 또 다른 피해자인 최아무개 상병의 유족을 만나 이번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듣고 싶었다. 기자는 군 당국에 최 상병 유족의 연락처를 부탁하였으나 군 당국은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아 접촉하지 못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 군당국은 18일 최종 수사결과 발표 때 대부분의 의혹이 해소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의혹이 얼마나 해소될 지 의문이다. 현지서 만난 군단, 사단 공보장교들의 설명을 문답식으로 정리한다.

- 발사된 탄은 7발인데 왜 주변 초소에서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나.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는 그 결과가 나와 있다고 하는데, 아직 우리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 파도 때문에 소리를 못 들었을 수도 있다."

- 사고 다음날 모래밭에서 발견된 탄알과 탄피는 어떻게 된 것인가.
"마찬가지다. 연구소 조사결과는 나와 있는 것으로 안다."

- 박 일병이 탄창을 갈아 끼고 총알을 장전하는 동안 최 상병은 뭘 하고 있었다고 보는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다."

- 사건 뒤 현장에 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바다에는 안개가 옅었고, 파도도 약했다고 하는데.
"(사고 당일)오전에는 파도가 심했다. 사고 뒤 부대원들과 소방서 대원들이 현장에 갔을 때는 날씨가 좋아진 상태였다."

- 유족들에게서 현장검증 테이프를 다시 빼앗아간 이유는 뭔가.
"(유족들에게)테이프 주겠다고 한 적 없다. 부검 전까지는 유족에게 보관하게 하려고 했는데 테이프 갖고 왔다 갔다 하면서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해 다시 뺏어온 것이다."

- 직속 상관들을 포함해 군 관계자들이 유가족들을 피했다고 하는데.
"유가족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이성적인 만남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중령이 감금당해 물세례를 당하고 그랬다. 관리책임 부실로 대대장은 보직 해임됐으며, 중대장은 징계대기, 소대장은 구속대기 상태다."(유가족 측은 이에 대해 당시 군 관계자가 "여기 내 의지로 있다. 나가고 싶으면 병력동원해서라도 나간다"고 말한 내용을 녹음해놨다고 밝혔다.)

- 박 일병 유가족 측에서는 최 상병이 폭행혐의로 불구속 처리된 영창 대기자였는데 그런 병사가 실탄을 소지하고 근무에 나서도록 한 것은 부대의 관리소홀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창대기병이 아니었다. 구타사건에 연루돼 징계에 회부됐으나 사안이 미비해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됐다. 관련자료가 다 있다. 박 일병에게도 (근무지를 옮길)기회가 있었다. 사고 발생 며칠 전에도 부대에서 구타 등에 대한 소원수리를 받고 근무지 변경 요청을 접수했는데 박 일병은 'PX'(군대 매점)에 자주 가게 해달라'는 말만 했었다. 구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총을 쐈다면 군에 사람이 남아나겠는가."


"이 꼴을 보고 대체 어떻게 아들을 군대 보내겠나"  
- 故 박성식 일병 이모 김영숙 씨의 '눈물의 탄식'  


▲고 박성식 일병  

강릉 국군병원에 영현실(영안실의 군대용어)에서 만난 고 박성식 일병(얼굴)의 유가족들은 매우 착잡하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다. 부모와 친형, 외삼촌, 이모, 사촌형제 등 유가족 10여명은 사고가 난 3일부터 지금까지 이 곳 영안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부모님과 친척 대부분이 대구와 서울 등에 살고 있어 강릉에는 연고가 없다. 길도 잘 모르고 나갈 곳도 없다고 한다.

외삼촌 김호선씨가 군관계자와 언론사 접촉 등을 위해 자주 밖에 나갈 뿐이다. 김씨는 "인천에서 소식 듣고 바로 내려왔다가 지금까지 발이 묶여서 회사에 휴직신청을 해야 할 판"이라며 "그러나 자살로 몰고 가려는 부대의 태도가 믿을 수 없어 끝까지 진실을 밝혀보겠다는 것이 유족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안실에서 만난 가족들은 하나같이 박 일병이 최 상병을 쏘고 자살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사고나기 3∼4일 전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8월 중순에 휴가 나간다고 좋아하면서 우표와 전화카드를 보내달라고 했었고, 친구들에게도 '곧 휴가 나가니까 돈 모아 놓아라'라고 했던 아이가 왜 자살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영현실에서 울며불며 하던 박 일병의 부모들은 최근 들어 틈만 나면 병원정문에서 농성을 벌인다. "군이 사건을 은폐, 조작하고 있다"며 진실을 밝히라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대구에서 온 박 일병의 친구들도 함께 하고 있다. 박 일병은 대구 모 대학 정외과 2학년을 휴학하고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박 일병의 형 현식씨도 지난해 12월까지 해안 초소 경계근무를 하다 제대했다. 사고지점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양양 해안에서 근무한 현식씨는 언론사를 비롯한 각종 사이트에 이번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글을 계속해서 띄웠다.

오는 8월 29일이 아들 입대 예정일이라는 박 일병의 셋째 이모 김영숙 씨는 "이 꼴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아들을 군대에 보낼지 모르겠다"면서 "성식이는 우리 애들처럼 기르다시피 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영현실 밖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나 고 박 일병 부모님의 농성모습을 바라보던 병사들 모두 난감하고 안타까운 표정들이었다. / 강릉=황방열 기자  
2002/07/17 오후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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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이름 군별 계급 소속부대 사고일자 사고유형 심의결과 조회
48 한국진 육군 상병 육군 제1보병사단 2003,06,25 사망 기타 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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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박성식 육군 일병 육군 제23사단 58연대 1대대 1중.. 2002.07.03 사망 사상 9518
45 유승환 육군 이병 육군 제51사단 3075부대 2대대 6.. 2002.5.25 사망 기타 10037
44 박성우 육군 이병 육군 제 11사단 9연대 7018부대 .. 2001.01.27 사망 기타 9491
43 강현구 육군 이병 2군지사 16보급대대 164중대 2000.09.06 사망 기타 7092
42 정종훈 해군 일병 해군 제 2함대 병 471기 2003.01.17 사망 기타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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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변창익 공군 하사 육군 제50사단 122연대 동원과 2002.08.31 사망 사상 6829
35 채희상 육군 일병 육군 제9사단 29연대 10중대 본부.. 2002.11.21 사망 기타 7538
34 신승희 기타 이경 충북 음성 경찰서 경비계 소속(대.. 2002,07.18 사망 기타 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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