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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사상자 유가족연대  자유게시판 - Free Board


  1985년2월24일 28사단 예하 화학지원대 총기사건 32주년 기리고,애도하며...
ㆍ작성자: 정의승리 ㆍ작성일: 2017-02-23 (목) 00:39 ㆍ조회: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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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24일 28사단 예하 화지대 사건  
<32년전(1985/02/24)경기도 양주시 신산리의 비극...>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에는 공병대대 정비대대 보충대가 있고,사건(1985/02/24)이 있기전에는 보충대 옆에 화학지원대가 있었죠.

사건  당시(1985/02/24),정치차원에서는 전두환 12대  5공정부 의해 12대 국회의원선거(1985/02/12)일명'2/12총선'전국 실시 2주일째 접어드는 시기였고,사회차원에서는 전두환 12대 대통령(1981/03/03~1988/02/20)임기(대국민퇴임)3여년 남겨두고 있는 시기였으면서,군 차원에서는 강원도 고성 동부전선 건봉산 까치봉 소재 22사단 56연대 4대대 예하 522GP에서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83학번이면서,83군번 조준희 일등병 의한 수류탄3발 폭발,M16A1총기 수십 발 난사사건, 수색대원4명사망 포함,당시 한주현 병장 포함한 수십 명 사상자(15명~22명 사망/10여명 중경상=당시GP소대장 김종환 중위 몸을 피해 생존했지만 보직해임,사단장 장기하 소장 보직해임, 대대장 곽근용 중령 보직해임. 관할 연대장 보직해임)발생시킨 후 무장월북한 사건(1984/06/26)8개월째 접어드는 시기인 동시에,계절차원에서는 늦겨울이 거의 끝나갈 시기였습니다.

직할대 일직사령들이 특히 정비대대 보충대 일직사령들이 부대 울타리내로 연해서 부대 취침후 순번을 정해 순찰을 하는데..근무를 서면서 순찰돌때 항상 화학지원대 터를 지나갔었죠.
그때는 화학지원대 터였는지도 몰랐지만.특히 새벽이나 저녁에 지나갈때 그쪽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오늘날까지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낮에 지나가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던 곳입니다. 
그믐날 비오는 창고지역을 밤에 혼자 지나갈때 느끼는 그런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돈사와 담을 두고 길게 큰 소나무가 몇그루 심어져 있지만 거의 허허벌판과 같은 곳이고 무서울 것도 없는 곳이지만 이상하게 싫었던 장소였습니다.

그 옆에 있는 직할대 병공통 교장 입구 건너편이 화학지원대 자리였습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이었고,일요일 해당 군 관계자가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6시50분 무렵,원인불명M16A1총성이 연달아 울려퍼졌고,지휘계통으로 군 관계자는 보고를 하고M16A1총성이 울려퍼진 곳으로 달려갔다고 하더군요.
해당대대와 화학대는 같은 울타리내에 있고 불과 20m~300m미터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울타리 1개당 연병장 두 곳으로 나눠서 쓰고 있었던만큼.바로 도착할 수 있었고,당시 군 관계자는 총성 발생시부터 거의 종료시까지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서 제일 끔찍한 날이었다고 하더군요.

이등병 1명이 근무를 서다가 당직하사가 있는 당직실로 들어왔고,당직하사가 수면상태를 확인하고 책상위에 있었던 키로 당직실 탄약통 키를 열고 통채로 탄통째 들고 본인 소속 내무반(現생활관)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 사건 당시 해당 이등병은 사고를 저지르고 곧바로 도망가지 않고,군 타격대 병력들과 대치를 했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것은 M16A1난사를 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고,난사를 해서 무차별차원 사살후,조준 실탄사격으로 원한이 있었던 선임병들 몇명을 차례대로 사살했다고 했습니다.
죽이면서도 죄명을 이야기 해줬다고 합니다.
"모상병...너는 몇월 몇일 나를 몇대 구타하고...어쩌고 저쩌고...내무반 입구로 걸어나가라...뒤돌아보지 말고...." 걸어나가면 뒤에서 실탄사격하고,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나를 무시하고 때렸고...."이런 식으로 내무실(現생활관)에서 계속 확인 조준사살을 지속했습니다.
좀더 정확표현시,확인 조준사살차원 뛰어넘은 개인차원 對선임 총살집행이었고 그리하여 대치가 상당시간 지속됐고 그 것을 설득하기 위해 군 정훈차량및 인원병력들까지 동원됐다고 했습니다.
군 타격대가 출동했고,수색대원들까지 투입됐는데,중도제압을 못했던 이유는 그 당시 내무반에 외부와 연결되는 입구가 1개였습니다.
내무반 입구는 1개인데, 내무에는 실탄과 수류탄,총기(M16A1)를 휴대한 무장병이 소속 부대원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서 무리하게 중도제압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계속 몇분 간격으로 총성은 지속 울리고,상당 시간동안 내무반 외부 병력간 대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사가 죽일 사람들 모두 사살한 후 탈출을 시도했다고 하는데,말이 탈출일 뿐이고,설득을 계속하니까,죽일 사람들도 없고 해서 설득을 당한 척 내무반 입구쪽으로 나왔을 때 외부병력들이 덮쳐,잡으려니까  몇 발자국 도망가다 체포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내무반에서 몇명이 대치과정 살아서 걸어 나왔는데,가해 무장병사가 살려주면서 그 선임병에게 "자기에서 잘해줘서 고맙다고...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외 몇명을 풀어줬으며,
그 과정상 사살않고 다리쪽만 총상을 입혀 살려준 선임병도 있었는데,사건 당시 군 관계자에 따르면 화학지원대 병력이 말이 지원대일뿐,사살상  소대 몇 개 모아 놓은 대급 감편 중대규모 미달되는 병력있었는데...
외출나간 소속 대원 몇 명제외하면,대부분 사살됐다고 합니다.
당시 사건현장에 직접 있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끔찍했고,그때 사망자가 최소 20명 넘었고,수치상 확실 않아도 대략24명~27명 전후라고 합니다.

  • 김성호 병장
  • 김상식 상병
  • 명승오 상병
  • 정종해 상병
  • 양경호 상병
  • 안명근 일병
  • 손정일 이병
  • 배진형 이병etc...
  • 유가족들의 승인/허락아래 공개된 희생병들외 실명 공개되지 않고,묻혀버린 다른 추가 20명 전후 근무병들까지 말입니다.
    화학지원대는 그 이후 직속 상급부대 의해 전격 부대재편성 조치돼고,재편성 당시 살아있었던 생존병들이 몇명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체들도 신속하게 여러곳에서 와서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12대 대통령(1981/03/03~1988/02/20)5공정부 시절이었고,완벽/철저형 보도통제(언론 통폐합급)의한,정부와 군 수뇌부 언론통제조치 겹치면서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고 그 사건 이후로 국방부에서 해당지역에서는 실탄휴대하고 근무투입하는 것을 규정상 금지조치 시켰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제일 괴롭혔던 직속 선임병 몇 명은 일요일에 외출나간 상태였답니다.



    사건 직후 판결문은 1985년 4월 12일 28사단 보통군법재판(1심),1985년 7월 4일 육군 고등군법재판(2심)상 기록이며 각각 A4용지 16쪽(1심), 3쪽(2심)이다. 박모 이병은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다음해 1986년 사형이 집행됐다. 직속상관인 최모 중사는 직무유기로 징역1년 6개월형,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은 박 이병이 사고를 저질렀던 직접적인 이유로 사고 전날인 1985년 2월 23일, 위와 같이 구타와 인권침해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 이병에게 가해졌던 구타,폭언 관련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타자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박기를 하는 도중 약 5회 구타당하고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머리를 약 6회 구타당하였으며, 일석 점호 도중 손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약 10분 정도 머리박기의 얼차려를 받게 되자 극심한 모욕감과 반발감을 느껴…."


    가해 박모 이병은 28사단 화학지원대 보급병이었습니다.
    판결문은 집안에서 1남2녀 가운데 둘째였던 박 이병에 대해 "평소 화목하지 못한 집안과 가족들이 계속되는 불행에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좌절감을 느껴왔다"며 "왜소체격/허약체질 때문에 각종 훈련이나 구보시 동료들에 비해 뒤처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963년4월3일 출생으로 1984년9월22일,입대한 84군번 박 이병은 화학지원대 보급행정병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시기상,22사단 조준희 수류탄/총기사건 3개월째 접어드는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속 선임병들의 계속되는 피복, 장비 등에 대한 무리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부담감이 컸습니다.
    이듬해 1985년 초에는 여동생의 대학입시 실패 소식에 절망했고, 사회에 대한 반항심까지 가지게 됐습니다.
    사건 전날인 2월 23일 밤 9시,내무실에서 손모 병장과 김모 병장 등으로부터 구타와 얼차려를 당한 박 이병은 결국 고참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날 새벽 5시 55분까지 범행 실행 여부를 고민하던 박 모 이병은 김 모 상병으로부터 근무교대와 관련해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박 이병은 1시간쯤 지난 새벽 6시 50분경 마음을 굳혔습니다.

    군법재판 회부된 박 이병은 1심에서 살인, 살인미수, 상관살해미수, 군용물 절도, 항명, 직무유기 등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도 그 형이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군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피고인만 가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적 받은 병사들은 가끔 상급자로부터 가벼운 얼차려나 구타를 당해왔다"며 "범행 전날 피고인이 당한 구타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국방부는 사건현장 보존하지 않고 곧바로 정리했다는 점. 동료 병사및 간부들 외출, 외박이 3개월 금지, 유가족에게 사건 현장 보여주지 않는등 국방부의 조직적인 사건 축소, 은폐, 조작 현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그외에 고참병사외 병사에게도 무차별 난사한 점, 생존 병사들에게도 부상 뿐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준 점 등의 이유를 들어 형을 확정했습니다.
    박 이병의 형 집행은 다음해 1986년 실시됐습니다.군 관계자에 추가설명 따르면,그 사건 이후 군에서의 군형법 의한 추가성 사형집행은 없었다고 합니다.

     

    1996년 10월 1일 강원도 철원군 육군 모 부대 김용식 상등병 K-2총기난사(3명 사망,2명 중상),

    1996년 10월1일(국군의날)오전 11시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민통선 북방 육군 모부대 김용식상병(23)이 중대 행정반에 총기를 난사, 동료 사병3명이 숨지고 직속상관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중상을 입은 사병은 서울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군당국에 따르면 김 상병은 부친의 사업(제조업)실패 및 애인의 변심등을 고심하다가 업무관련 상관의 인격모멸발언,폭언을 듣고,이날 야간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평상시 처럼 행동을 하다 갑자기 자신의 K2 소총을 들고 중대 행정반에 들어가 실탄 25발을 난사했습니다.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 28사단 예하 GP김동민 일등병 K-1총기난사(8명 사망,4명 중경상),

  • 범인: 김동민 일병(1984년 8월 14일생, 당시 만 20세)
  • 사건내용: 내무실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K1 기관단총 44발을 난사해 6명이 현장에서 즉사. 이후 체력단련장으로 이동한 김동민 일병은 그 곳에서 만난 김종명 중위를 K1 기관단총으로 사살함.
  • 사망자: GP장 김종명 중위(26.학군41기), 전영철(21), 조정웅(21), 박의원(22), 이태련(21), 차유철(21), 김인창(21), 이건욱(20) 모두 상병
  • 부상자: 김유학(20), 박준영(20) 모두 일병임.
  •  
    2006년 8월 10일 경기도 가평 모 포병대대 이모 이등병 경계근무 끝마치고 복귀과정 K-2소총 실탄사격,
    박종석 상병(과다출형 사망),김상혁 병장 어깨 관통상
     
    2011년 7월 4일 인천광역시 강화도 해병2사단 내무반 김민찬 상등병K-2총기난사(4명 사망),
  • 범인: 김민찬 상병(19)
  • 사망자: 이승훈 하사(25), 이승렬 상병(20), 박치현 상병(21), 권승혁 일병(20)
  • 공모자: 정준혁 이병(20)
  • 부상자: 권혁 이병(19)
  •  

    2014년 6월 21일 강원도 고성 22사단 예하GOP임도빈 병장K-2총기난사(5명 사망,6명 중경상)

    • 사망 - 5명: 김영훈 중사(당시 분대장), 진우찬 병장, 이범한 병장(당시 부분대장), 김경호 상병, 최대한 상병
    • 부상 - 7명: 관통상(2명), 수류탄 파편상(5명)

     

    사형확정 되었는데,현재까지 집행되지 않고 있는만큼 박 이등병은 군 병영내 마지막 사형집행수였던 것입니다.

    사건 발생 32년째 접어드는 28사단 예하 화학지원대 총기(M16A1)사건 그리고 올해로서 군법 최고형 마지막 집행된지 31년째 되는 고(故)박(朴)()()이등병(二等兵)...  
    불우한 가정환경과 고참의 지속적인 얼차려와 인권침해적 발언에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저지른 박 이등병. 당시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못한 참혹한 사건의 전말이 판결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박 이등병,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터뷰] 당시 재판 담당한 이기욱 민변 부회장

    지난 1985년2월24일 28사단 화학지원대 M16A1총기난사 사건의 가해병 박모 이등병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다음 해(1986년)사형에 처해졌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된 해이기도 하였다.  
    당시 고등군법재판에서 이 사건의 재판을 담당했던 법무사(군판사)가운데 한 명은 이기욱 민변 부회장(변호사).

    이기욱(李基旭)

    이기욱 ○ 성       명 : 이 기 욱 (李 基 旭)
    ○ 생년월일 : 1955년 6월 7일
    ○ 주       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



                              학                력
    ○ 1975. 2 경기고등학교 졸업
    ○ 1979. 2 한양대학교 법학과 졸업
    ○ 1982. 2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 2000. 12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주 요 경 력
    ○ 1980.      제 4회 군법무관 시험 합격
    ○ 1980-1991 군 법무관(사단, 군단 법무참모, 고등군사법원 군판사)
    ○ 1991. 7    변호사 개업
    ○ 1994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기획위원장
    ○ 1997-1999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 1999. 8    법무법인 창조 대표 변호사(現)
    ○ 2000-2002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동북아특별위원장
    ○ 2002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 명예회복 활동을 위한 변호
     

     
    그는 "굉장히 큰 사고여서 충격적이었다"고 심정을 밝힌 뒤 "나는 사형 폐지론자지만 피해자 규모가 너무 커 사형에 반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10년간의 군 복무 기간 중 사형을 확정한 것은 이 사건뿐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박 이등병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면서 "자신의 잘못이 너무 커서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고 생을 단념한 사병이었다(生 斷念 軍 勤務兵)"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울었던 기억이 난다"며 "가족들은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박 이등병을) 살리고 싶어했지만 (박 이등병의 의지로) 결국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그 친구 이름도 생각나고 모습도 선명히 기억한다"며 "이상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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