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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fake)김일성(金日成)=>김성주(金聖柱)관련해서...
ㆍ작성자: 정의승리 ㆍ작성일: 2016-07-24 (일) 23:32 ㆍ조회: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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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김일성 뒤편도열한 소련군 장성들 가운데 제일 오른쪽이 소련 25군 군사정치위원 Lebedev 소장이다. 김일성은 레베데프가 달지 말라고 한 소련군 적기 훈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나왔는데,후대에 실린 같은 사진에는 가슴의 적기 훈장과 뒤의 소련군 장성들이 삭제되어 있다.당시 김일성은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말도 잘 못해 연설을 심하게 더듬거려 가짜라고 대중들의 의심을 샀다.
김일성(金日成,1912년4월15일'출생'~1994년7월8일'급사')본명은 김성주(金聖柱).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본명은 흔히 알려진 김성주(金成柱)가 아니라 김성주(金聖柱)이다.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金日成, 1901-1937)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자 그 공을 가로채기 위해 그때부터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고 88여단 동료들이 증언했고, 본명까지 김성주(金成柱)로 따라서 바꾸었다.
김성주는 1938년경부터 한자로'金日成'이라 쓰는 이름을 쓴 것은 확인이 됐어도,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살아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더듬거리며 잘하지 못해 조선 발음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진지첸'으로 읽었다. 진지첸(金日成)과 김일성(金日成)을 동일한 이름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일은 소련군 문서에 적힌 그의 이름이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인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1894년7월10일'출생'~1926년6월5일'사망')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1892년5월7일'출생'~1932년7월31일'사망')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칠곡은 그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평양 만경대이다.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김일성의 전주김씨 12대조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김형직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1871년2월3일'출생'~ 1943년11월14일'사망')은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팔도구소학교를 다녔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교장을 맡기도 했다.

 김일성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의 붉은 군대를 따라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평양에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다.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하고,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김일성장군이라고 그를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실제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은 만주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도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일반 대중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전공(戰功)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김일성은 북한으로 들어와 1당 독재·1인 독재·1족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소련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권 구축을 위해 더욱 숙청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김정일(金正日)에게 1974년도부터 1994년도까지 20년간 정치경험을 쌓게 한 후 후계자로 삼았다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金正日:1941년2월16일'출생'~2011년12월17일'급사')부자,그리고 김정일(金正日)과 김정은(金正恩)부자의 3대간 본관은 전주김씨(全州金氏)다. 전주김씨의 시조묘역는 전라북도 전주 모악산에 있다. 전주김씨의 선조는 본래 경주김씨였다.그러나 여러대를 내려오다가 고려 때 문장공 김태서(金台瑞)가 경주김씨에서 전주김씨로 분관하여 전주김씨가 된다. 그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의 후손이다.

1928년에 간행된 족보를 보면 시조묘가 그려져 있는 전주 모악산 일대가 그려져 있고 시조가 김태서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또 김태서의 32대 손으로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金成柱)>와 동생 <김영주>의 이름이 나와 있다.

그는 1930년대 중반 중국공산당 동만특별구위원회 휘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중공 유격대원으로 있었다. 1936년 2월 본 대오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된 이후 본 대오 소속했다.
김일성은 1940년 말경 동만으로부터 소련 연해주 도망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하바로프스크 근교 설치된 소비에트극동군 소속 국제88특별저격여단 소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극동군 국제88여단 경우,해방이후 김일성이 북조선인민공화국 건국(1948/09/09)이래, 북조선인민군 건군(창군)모체 기반(주춧돌)자리매김하였다.
본 국젱여단은 중국 이름으로 동북항일연군 교도파라 했는데, 그는 족장 중국인 주보중 부하이기도 했다.이상에서 보면 김일성은 우선 1930년대 초기부터 중국공산당원이었다.
재정립 표현시,그에게는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경력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1940년대 전반기(1940년~1945년)소련극동군 소속 일명[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대위였다.
그가 KGB요원이었던 것은 조선인민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강 수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중공단원이었는데, 소련공산당 수족이었던 것이다. 중공유격대원이었는데,한국인이었던 그는 국권회복 이후 중국으로 가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중국 팔로군과 연계한 만주독립군의 일부로서 보천보전투(1937/06/04)를 지휘했던[일본육사23기 김광서:김일성(金一星:1901년'출생'~1937년11월13일'사망')이 보천보 전투에서 승전을 기록하게 됩니다.
사실상 팔로군이 지원한 만주독립군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을 주적으로 하여 활동한 부대로서 동아일보에서 김일성에서 승과 기념으로 금박 을 입혀주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한때 중앙정보부의 기관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은 아호(兒號)김성주(金聖柱)로 활동하다가 만주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보천보전투에서 본명 김광서(김일성:金一星)장군이 보천보전투(1937년6월4일)에서 일본군의 추격과정에서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 이름을 김일성(金日成)으로 바꾸게 되었다
 북한 김일성이 일찍부터 알려졌던 대로 가짜가 맞다는 것은 구태여 일제시대 기록을 뒤져 근거를 찾아내지 않더라도 해방 당시의 기록과 증언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해방 당시 북한에 소련군이 데려 온 김일성이라 칭하는 자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국내 언론들에 해외의 독립지사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과 나란히 김일성 장군이 보도되고 있었다.
진지첸 대위는 극동군 국제88여단에서 표면적으로 1대대 대대장이었는데,내막은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해 극동군 정찰국장이자 KGB(당시는 NKVD) 극동 책임자인 Naum Semyonovich Sorkin (1899 – 1980) 소장에게 보고하는 KGB 비밀 정보원이었다. 그덕에 소르킨 소장과 극동군 사령관 푸르카예프(Maksim Alexeyevich Purkayev, 1894 - 1953) 대장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일약 북한 지도자로 선택된다. 소르킨은 악명높은 인간 도살자 NKVD 수장 베리아 (Lavrentiy Beria, 1899 – 1953)의 심복이었으므로, 베리아가 스탈린을 움직인 것이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후인 1945년 9월초 진지첸 대위는 극동군 사령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불려가서 스탈린을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최종 승인을 받는다. 극동으로 돌아온 진지첸은 88여단 동료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비밀리에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항하여 기차로 평양에 온다. 그후 1달여간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민심을 살피고 돌아다니며 어떤 식으로 대중 앞에 나설지 방안을 탐색했다.
평양 소련군정 당국자와 진지첸 대위가 부딪힌 제일 큰 걱정거리는 비록 스탈린의 낙점을 받았지만 진지첸이 국내에서 완전 듣보잡 무명인사라 대중 앞에 어떤 방식으로 나서야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지였다. 해방전 5년간 소련 극동의 시골 마을 소련군 부대에 꼭꼭 숨어 있던 진지첸 대위가 누구인지 알아볼 사람이 국내에 누가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지도자로 나선다?
그러나 묘수가 있었다. 당시 평양에서 진지첸 대위 수령만들기 정치 공작을 진두지휘했던 정치 사령관 레베데프(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죽기 1년전에 모스크바로 찾아온 중앙일보 기자에게 당시 일을 증언하였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창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소련군이나 진지첸 대위나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는 국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유명한 줄도 몰랐다. 그런데 사정을 파악한 후 무명인사 진지첸 대위가 누군지는 불분명하나 이름은 전설적으로 유명한 김일성 장군으로 하루 아침에 둔갑하게 되는 사연이다.  Gavril Korotkov (1925~ )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1일까지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으로 적혀 있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이날이 국내 누구도 모르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위대한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날이다.

이런 준비 끝에 1945년 10월 14일 드디어 평양 공설 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가 열리고, 구름같이 군중들이 몰려 들었다. 차례가 되어 위대한 김일성 장군이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가짜다!", "속았다!"
모여든 군중들 태반은 진지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 눈앞에 33세의 새파란 젊은 이가 나타나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다니 대중들은 분노할 수 밖에.

이러한 소식이 남한에 전해져 남한에서도 일찍 부터 김일성 가짜설이 퍼진 것이다. 어릴 때 조선을 떠나 중국과 소련을 전전한 진지첸 대위는 국내에 완전 듣보잡 무명인사에다 지지세력도 없으니, 누군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도용하고, 실존 인물 보천보 김일성(1901~1937.11.13)의 전공을 가로 채서 유명한 항일 영웅 행세를 하며 북한 권력을 장악하고 마침내 세3대세습 독재왕조로까지 직결 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후 남한 학계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가짜 김일성이 진짜로 둔갑해 있다.

남한 학계에는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드는 정치 공작을 직접 수행한 소련군정 당사자들보다도 당시 일에 대해 좀더 잘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해방 직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록 - 북의 가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들 보도에 나오는 김일성 장군은 명백히 해방전 5년간 극동의 소련군 부대에서 사육된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대위다. 소련군 등에 업혀 평양에 온 진지첸 대위는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던 자신의 치명적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이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그 이름을 사칭한 것이다. 이승만, 김구와 달리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했던 것도 진지첸 대위가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거짓말인 것이 드러난다.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을 기억하고 김일성과 관련지어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천보 사건이 제 아무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어도, 당시는 국민 80~90% 이상이 문맹이었으며 신문 배달망도 없는 농어촌에서 바깥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는 담쌓은채 살았다.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전설은 신문 보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1910년대부터 학교나 장터 같은 곳을 통해 오랜 기간 구전(口傳)으로 퍼진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의 북한 김일성에 대한 정보 기록 : 1948년 8월, 1952년 7월
위 기록들은 해방 후 미군정과 일본의 미극동군사령부가 북한 김일성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 분석해서 정리한 기록인데, 그를 imposter(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사기꾼)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물론 북한에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짜 김일성)가 집권한 후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진짜 김일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은 위 언론에 보도된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의 기사와 같이 해방전 일제시대부터 조선인들 사이에 풍문으로 떠돌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다. 이것은 책임있는 당국자가 면밀한 정보분석을 통해 기록한 것이므로 해방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 알려진 김일성 장군이 어떤 인물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당시 미군에게도 없었고, 북한이 내놓은 정보는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연히 남한정부에도 북한 김일성에 관련 정확한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해방 후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의 귀국 모습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 왜 이분들처럼 공개적으로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지 못하고, 쥐새끼처럼 숨어 들어와 자신이 귀국한 사실도 한 동안 비밀에 부치고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쓰며 돌아다녔겠는가?
또 위 기사들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이라면 소련이 지도자로 택하는데 '중대급 결격(결함)사유'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명도만으로 얼마든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에 얌전히 소련의 말을 들을(소련정부'입김영향')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일부러 진지첸 대위와 같이 국내정치상 무명이고, 지지세력이 전혀없는 자를 지도자감으로 골랐을 것이다. 소련군의 무력과 정치공작을 동원하면 무명인사라도 지도자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진 정치적 신세 때문에 해방 직후 평양에서는 조만식(1883년2월1일'출생'~1950년10월15일'사망')선생 주변에 사람과 정보가 제일 많이 몰릴 때였지만, 조만식 선생도 소련군이 데려온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진짜 아닌 가짜 김일성장군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생이 이런 정도였다면, 다른 ㅇ리반 사람들이야 좀더 말할 필요자체 없었을 것이다.

解放前後의 朝鮮眞相 / 金鍾範; 金東雲 共著 朝鮮政經硏究社, 서울, 단기 4278(1945)년 12월 25일 발행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김광서(일명 김경천)장군이 진짜 김일성이고, 평양의 김일성은 그 이름을 사칭한 자로 보았다.
해방 직후 미군의 김일성에 대한 정보 기록 : 1948년 8월, 1952년 7월
미군정이나 일본의 미극동군 사령부도 김일성은 imposter(남의 이름을 사칭한 사기꾼)로 보았으며,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고, 북한이 발표한 내용은 조작되었고,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해방 당시 소련군이 북한 지도자로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데려 온 진지첸 대위는 국내에서는 완전 무명인사에 지지세력도 전무한데다 오랜 외국생활(중국,소비에트사히주의연방공화국)로 중국어,소련어 유창해도 조선말(한국어)자체 심하게 더듬거렸으므로 그를 실제 지도자로 만드는데는 수많은 정치 공작을 통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평양 소련군정의 표면적인 책임자는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Mikhailovich Chistiakov, 1900-1979) 대장이었으나, 그는 야전 군인으로 정치는 잘 몰랐고, 실질적으로는 소련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Terentii Fomich Shtykov, 1907-1964) 중장이 소련군정의 총지휘자였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권력을 잡아도 소련 말을 듣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소련군이 북한 지도자로 데려온 진지첸 대위가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였다는 것은 아래 기록들에서도 드러난다. 해방 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던 인물인지 아는 사람은 국내에는 없었다. 그와 같이 만주에서 빨치산하다 소련으로 도망가서 극동군88여단 같이 있었던 동료들만 정확한 행적을 알았을 것인데, 그들은 모두 북한으로 가서 핵심 권력층이 되었으므로 남한에서는 진지첸 대위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자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니 가짜라고 하는 소문만 무성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한 임시정부의 견해 : 안우생(安偶生) - 1945년 12월 5일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을 임시정부 인사들이 김일성 장군은 연로한 분이고, 북한에 나타난 33세의 젊은 김일성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레베데프(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아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괄하였다. 1990년 한소 수교 후 소련 군정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을 직접 담당했던 인사들 중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레베데프 소장, 메클레르 (Grigory Mekler, 1909~2006) 중좌, 레오니트 바신(Leonid Timofeevich Vassin, 1915~?) 소좌 등이 소련군정 시기의 일들에 대해 증언을 하였다.
그들은 국내에 아무 지지기반도 없는 무명인사인 진지첸 대위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인민들이 항일 영웅으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 이름을 사칭하기로 결정하고, 1945년 10월 14일의 군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앞에 그를 김일성 장군 소개시킨다. 하지만 바로 그 장소에서 가짜라는 소리가 퍼지고 소동이 벌어지자 몽둥이를 휘둘러 군중들을 쫓았다고 했다. 또 가짜라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고향 마을 만경대로 데려가 조부모와 삼촌 등 친척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여 가짜 소문을 잠재우려 했다. 인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조만식 선생과 그 측근들을 친일파로 몰아 구금한 것도 이러한 정치공작의 일환이다. 평양 소련군정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한 이들의 보다 자세한 증언은 아래를 참고하라.
김일성의 귀국을 비밀에 부치라고 한 소련 극동군 최고 지휘관들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 입항하여 평양으로 왔으나, 스티코프는 당분간 그의 귀국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지시한다. 국내에서 완전 무명인데다 지지세력도 없는 그를 대중앞에 내세우려면 사전 준비 작업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메클레르"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그가 권좌에 첫 발을 들여 놓을 때, 우리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라고 한 증언이 진지첸 대위(fake 김일성 장군)의 당시 상황(입장)을 자세하게 말해 준다.
가짜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을 주도한 소련군정 고위인사들의 증언
"소(蘇), 김일성(金日成) 권총협박 정권 떠맡겨" 러 중앙TV「김부자(金父子) 특집」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진짜 유명한 김일성(보천보 항일전투 주역)장군이 맞다면 왜 자기 힘으로 집권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이러한 수많은 정치공작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까?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증언했던 수많은 월남민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할 무렵부터 친북반한 세력이 득세하여 학계까지 장악하고 북의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켜 놓았다. 물론 위와 같은 불리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그들은 언필칭 김일성 가짜설은 더 이상 학계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떠들어댄다. 이런 사이비 종북 어용학자들이 더 이상 학계에 발붙일 수 없는 날은 언제나 올까?
특히 김일성은 중국어와 소련어(러시아어)에 유창하고 능숙했다.매우 어린시절부터 중국에서 자라며 생활했고,중국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특히 중국어 관련 거의 모국어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어(러시아어)관련해서도 말하고(speaking),쓰는데(writing)부진함 없었다고 한다. 6/25전쟁(1950년6월25일'발발'~1953년7월27일'휴전체결')개전前/전시기간/休戰이후 무렵에도 모스크바(소련),베이징(北京:중공)드나들면서 정당-정계-군부 주요고위(핵심)관계자들과 '별도통역(수행원)'없이 회화교환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김일성이기에 소련,중공으로부터 물자(군수물자 /장비 & 군화기),인력(대규모 군사병력지원)을 이끌어내 성사시켰을 것이다. 
 
중화인민지원군 최고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가 바라본 미군 관련 평가
한국전쟁 당시,김일성의 침략은 국제연합 즉 유엔의 참전결의로 최초의 유엔군 결성과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습니다. 백선엽장군의 낙동강 다부동천투에서의 승리와 맥아더 사령간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의 남침공산인민군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긴급 지원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모택동은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抗美援朝라는 기치아래 100만의 중공군을 투입하였습니다.
전쟁의 기간가운데 유엔군과 접전을 통하여 각군(참전군)에 대한 팽덕회 사령관의 평가가 참 재미있습니다.
먼저 미군에 대한 평가입니다.
 
1. 장거리 행군을 싫어한다.
차량지원이 되지 않는 지역에 대한 전투는 기피/회피한다.
이 점이 팽덕회가 지적한 미군의 제일 큰 문제점중 첫째 였습니다. 이런 미군의 특성을 중공군은 십분 활용하여 팔로군시절부터 단련되어 온 산악행군의 특기를 살려서 산악을 이용한 중공군의 우회기동전술은 미군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중공군 개입 초(1950년10월26일)부터 서울을 다시 적의 수중에 내주기까지(1951년1얼4일'1/4후퇴')미군에게 상상하기 어려 울 정만큼 중공군의 산악이동 행군속도는 미군의 작전계획을 유명무실화 시키는 일이 다반사(비일비재非一非再)였습니다.
2. 야간전투에 취약하다
팽덕회의 관점에서 미군은 야간전투에 극히 취약하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전투공격은 대부분 야간에 이루어 졌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야간에 공격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미군에게 일종의 공포로 작용하였습니다.
즉 미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신속한 산악이동과 함께 이어지는 중공군의 야간 기습공격으로 미군은 제대로 작전을 펴보기도 전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항공전투력(공군력)관련 지나친 믿음,의존
전쟁 전기간에 걸쳐서 팽덕회 체제 중공군이나 김일성 체제 북한군에게 제일 공포스러운 존재는 미군의 항공전력 즉 공군력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군은 공군의 지원없는 전투에서는 전투력이 극히 취약하다는 것을 간파/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팽덕회는 공군이 쉽게 지원할 수 없는 지역과 시간 그리고 환경을 골라 미군을 공격하였고 이 작전은 많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즉 악천후 기간동안 집중적 공격을 감행 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악천후 전투에 취약한 미군은 전투손실을 많이 입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가 본 한국전때 미군의 취약점이었습니다.
이런 팽덕회도 미군의 화력지원과 공지합동공격 그리고 체계적 군수지원체계 관련해서는 아낌없는 상당급 호평였습니다. 그런 미군의 본 모습을 보게된 팽덕회는 1951년 가을무렵부터 휴전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결과1953년7월27일 10:12a.m.북한군 대표(남일 소장) 對 UN군대표(해리슨 중장)'휴전협정'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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